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근혜 5촌 살인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파일:external/ilyo.co.kr/1316397016425351.jpg]] || [[파일:external/ipickmeup.com/14786612022425.jpg|width=300]] || 박용철은 [[육영재단]] 폭력사건 당시 박지만의 최측근으로서 폭력 사태를 주도한 바가 있는 인물이다. 박용철은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친손자이자 국제전기기업 대표인 박재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삼남매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더 쉽게 말하면 박근혜 남매의 사촌의 자식들이다.] [[결혼]] 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기에 사망 당시 [[국적]]은 캐나다였다. 박용철은 2007년에 재입국하여 당시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박근혜의 경호원 노릇을 했는데 이때 박지만과도 손을 잡고 육영재단 문제에도 관여하였다. 2007년 7월 박용철은 박근혜 캠프에서 중국 재경부 장관을 만난다는 이유로 당시 박근령의 약혼남이자 [[백석문화대학교]] 겸임교수였던 신동욱과 [[중국]] [[칭다오시|칭다오]]에 함께 갔다. 그런데 칭다오에서의 첫날 밤에 신동욱이 자기 신변이 위험하다면서 건물에서 뛰어내려 골절상을 입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경찰|중국 경찰]]에게 신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육영재단 폭력사건에 개입하여 박근령 이사장을 쫓아내는 것을 주도했다. 당시 중국에서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신동욱은 2년 반이 지난 2010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홈페이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박지만이 박용철을 시켜 나를 살해하려 했다. 육영재단 강탈 사건에서 박지만은 허수아비였고 배후는 박근혜의 주변 사람들이다.”는 글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올릴 때마다 글이 지워졌는데 40여 차례에 걸쳐 계속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문제가 되자 홈페이지 주인이었던 박근혜는 하나뿐인 제부~~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엄청난 [[불구대천]]이었다~~를 명예훼손죄 및 허위사실유포죄로 고소했다. 2016년 12월 16일자 [[http://www.nocutnews.co.kr/news/4702645|노컷뉴스 기사]]에서 육영재단의 폭력사건에 관여했던 관계자의 증언을 다루었는데 이 관계자에 의하면 당시 신동욱이 표를 깎아 먹는다고 판단한 박지만 EG회장과 참모 진영에서 '신동욱을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 이에 신동욱을 [[미얀마]]에서 총기로 살해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재판 과정에서 신동욱이 주장한 청부살인 시도 건은 인정되었지만 박지만과의 연관성은 부정되었다. 이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용철은 박지만이 이 사건과 무관하고 박지만의 측근인 정용희 씨가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0년 9월 1일 재판 과정에서 박용철이 자신이 한 증언을 번복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증인으로 나온 육영재단 전 법무실 부장 이 모씨가 “박지만이 박용철에게 신동욱을 제거하라고 지시한 육성 녹음이 있고 통장으로 돈을 부쳐 준 증빙이 있다.”는 얘기를 박용철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용철도 이를 긍정하면서 “EG그룹 회장 박지만의 비서인 실장 정용희가 내게 회장 박지만의 뜻이라고 말한 육성을 휴대전화 단말기에 녹음해 놨다.”고 증언하였다. 박용철의 증언 이후인 2011년 8월 신동욱은 [[박지만|처남]]이 자신의 살해 기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여 법정 구속되었는데 이에 신동욱 측 변호인은 2011년 9월 27일로 예정된 변론에 박용철을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박용철이 9월 27일에 증언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변론을 20여 일 앞둔 2011년 9월 6일 중요한 증언을 하기로 했던 박용철이 [[북한산]] 국립공원 사무소 수유분소 앞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동욱은 결국 이 소송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박용철이 이처럼 진술을 번복한 이유에 대해서는 본인이 자세한 내막을 밝히기 전에 숨졌으므로 자세한 부분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박용철은 자신의 주도로 육영재단에서 박근령 세력을 축출한 후 육영재단 어린이회관 관장[* 조직폭력배가 어린이회관 관장이라는 게 뭔가 섬뜩해 보일 수 있겠지만 어린이회관은 일반인들도 결혼식장으로 이용하는 등 임대사업을 하는 곳이다. 쉽게 말해 이권이 걸린 곳이라 생각보다 상당히 꿀보직인 셈이며 박용철은 박근령계 축출에 따라 보상격으로 임명된 것이었다.]에 잠시 임명되었으나 이내 교체되었고 이후 박지만 세력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영재단 폭력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이를 '토사구팽'이라고 지칭하면서 박용철이 박근령의 축출에 이용된 후 박지만 측에게 버려졌다고 증언하였다.] 따라서 당시 박용철의 지인들과 범죄 전문가들은 박지만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은 박용철이 박지만을 압박하려고 진술을 번복했을 것으로 추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